정신분석 리뷰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 -- Caroline Knapp
크레도
2021-07-12
2021-07-12 15:09:43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9678407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엄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나 42세때 폐암으로 사망한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의 거식증 이야기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에서 발췌한 부분들. 심리치료사와 오랜 관계를 통해 거식증에서 차츰 벗어나는 치료과정에 대한 묘사가 인상 깊은 책.
41 새 천 년의 초입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깔린 가장 주된 욕구는 아마 욕구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말이다.
49 여성의 많은 행동(체중과 외모에 대한 집착, 명백한 자기파괴적 성향)은 하나같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병이라고 치부된 후 ’낮은 자존감‘의 폐품 더미에 던져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항상 낮은 자존감이란 너무 빈약한 근거라고, 마치 넣어야 할 재료 중 열 가지를 빼고 끓인 묽디묽은 수프 같다고 느꼈다. 자기 신체에 능동적으로 해를 입히거나 억지로 자신을 굴복 상태에 몰아넣는 여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연애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여자, 인사불성으로 쇼핑을 하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여자를 고통에 몰아넣는 것은 초라한 자아상 같은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낮은 자존감‘이라는 말은 좌절된 욕구에서 베어나오는 슬픔과 허함을 단 한 방울도 포착하지 못하며, 엉뚱한 대상으로 치환된 욕구에 동반되는 괴로움도, 욕망들이 그렇게 여러 방향의 잘못된 경로로 흘러가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또한 느껴야-할지 몰라서 겪는 고뇌도 좀처럼 포착하지 못한다.
56 그토록 기괴한 집착이 지닌 수많은 의미와 의도를 이해해보려 노력할 때, 내게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바로 그 차분함, 대양처럼 광대하면서도 도저히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던, 어떤 불안에서 해방된 것 같았던 느낌이다. 나는 수년간 매일 같은 음식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같은 시간에 먹었다. 음식에 관해 생각하고, 음식에 저항하고, 다른 사람들이 음식과 맺는 관계를 관찰하고, 내가 정해둔 티끌만 한 양의 음식에 탐닉하는 시간을 기대하는 등 이 모든 노력에 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쏟았다. 이렇게 협소하고 구체적이며 강박적인 엄격함은 내게 비할 데 없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59 거식증은 음식과 체중에 대한 집착을 거꾸로 뒤집고, 그 집착의 에너지를 음식의 준비와 제공과 소화가 아니라 음식 및 음식이 대표하는 모든 것, 즉 풍요와 풍성함과 돌봄을 회피하는 일로 돌림으로써 음식과 체중에 대한 여성의 전통적인 몰두를 무력화하는 한 방법이다.
315 나는 거식증을 놓아보내고 애도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뚜렷이 기억한다. 그것은 거식증이 주던 예측가능하지만 헛된 안전함의 상실 때문에 우는 것이며, 이는 사실 자기 자신, 바로 그런 안전함을 필요로 하며 굶는 것 외에는 안전함을 확보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불쌍하고 겁먹은 자신 때문에 우는 것이다.
317 거식증은 기본적으로 부인하는 상태, 배고픔을 부인하고 고통을 부인하고 감정을 부인하는 상태이지만 그 부인에는 아주 자주 균열이 생기고, 그러면 전력으로 닥쳐오는 허기의 위세를, 허함과 절망의 깊이를, 그 아픔의 막대함을 느끼게 된다.
318 치료사가 물었다. 거식증이 당신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했던 건가요? 그것으로부터죠,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건 바로 그 허함, 바로 그 절망과 실망의 강도, 바로 그 눈물, 항상 가까스로 흘리지 않고 버텨냈고 부인했고 굶음으로써 쫓아버렸던 그 눈물, 한마디로 슬픔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둘 다 잠시 침묵에 잠겼다. 아마 우리는 복잡하게 뒤섞인 이런저런 공통된 마음의 반응들에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름날의 슬픔에 대한 존중, 슬픔으로부터 보호해줄 거라는, 유혹적이지만 순전히 환상일 뿐인, 굶기의 능력에 대한 이해, 슬픔이 뻗어나갈 수 있는 생각보다 더 넓은 범위와 슬픔이 영혼 속에서 끈질기게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인정이 그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내가 느낀 아픔-외로움, 허함, 갈망-은 거식증 이전부터 존재했고 거식증과 나란히 공존했으며 거식증이 지나간 후에도 잔존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다.
320 뭔가가 빠져 있어. 이 말은 그나마 내가 그 느낌을 설명하는데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것은 놓쳐버렸거나 좌절된 관계들에 대한, 한때 무언가 사랑스럽고 견고한 것이 존재했던 자리에 남겨진 거대한 공동에 대한 인식이다. 나는 이것이 그 허기의 대양, 욕구의 바다 바닥에 깔린 거친 모래알이라고, 그저 인간이기에 느끼는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328 어머니와 내 언니 오빠 사이에는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아버지와 더 비슷했고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더 잘 맞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매우 결정적인 측면에서 어머니의 원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 얼마나 확실한지 혹은 안정적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329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머니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근원이 뭔지 몰라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나를 초조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만들고 씁쓸한 분노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하게 된 것, 혹은 다가가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분노 아래 깊이 흐르고 있던 슬픔이었고, 너무나 격렬해서 평범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는 연결에 대한 갈망이었다.
329 그게 내가 굶었던 이유일까?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굶기는 어머니와 관계된 것들 외에 더 많은 종류의 근원들에서 비롯되었고, 더 많은 목적에 기여했다. 비난을 모조리 어머니에게 돌리는 것은 문화나 미디어만 탓하는 것만큼이나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내게 특수한 종류의 허한 느낌을 남겼다고 생각하는데, 슬픔이 점점이 배어 있는 그 허한 감정은 결코 나에게만 있는 특유한 것이 아니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생겼고 기억이 닿을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먼 곳에 있는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들은 새로 내린 눈으로 덮여버린 발자국들과 같다. 그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춰지고 봉해지며, 괴로움을 느꼈던 흔적들을 알아보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허기 뒤에 자리한 슬픔은 행동으로 표출되는 경향이 있고, 명사들과 동사들 대신 상징과 암호로 묘사된다. 한 여자의 몸과 행동은 언어가 좀처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전달한다.
332 강박적 도둑질, 자해 폭식증은 서로 무관하고 전혀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들에 깊이 의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전의 은밀하고 기괴하며 만족감과 죄책감 모두를 유발하는 도벽의 역사는 어떤 중심적인 박탈감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그 박탈감은 수전이 평범한 말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고 평범한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 감정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수전의 말이다. “그나마 박탈감이라는 단어가 좀 가까운 것 같아요. 무언가를 놓쳐버렸다는 느낌, 그리고 그 때문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느낌이요. 그건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것이 알고보면 얼토당토않은 립스틱이나 초코바라고 해도 말이에요.”
332-333 제닛의 폭력적이며 꼭 필요한 일인 것만 같은 자해는 그와는 반대되는 느낌을 전달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권리가 없다는 감정, 권리가 없다는 느낌에 대한 깊은 괴로움이다. 자기 살을 베는 행동에 이르게 된 마음의 틀을 묘사할 때 재닛은 풍선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건 마치 내 몸 전체가 너무 부풀어 올라서 터질 것 같은,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인 느낌이고, 그 감정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은 나를 베는 거예요. 피로 흘려 보내는 거죠.” 물론 그 부풀었다는 느낌은 물리적 체중보다는 감정적 무게에 관한 것이다. “필요한 것, 원하는 것, 불안, 글쎄요, 감정들이에요. 존재하는 모든 감정, 아무 감정이나 가져다 대고 다 맞아요. 나는 자해가 게워내는 것과 많이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 충동은 아주 거대해요. 그냥 그걸 제거해버리려는 충동,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이든 그걸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제거해버리려는 것이죠.”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335 수전은 특수한 허기의 감각을 갖고 성장했고-한번도 충분한 포만감을 느낀 적이 없고 한번도 자신이 남들과 똑같이 먹여질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 아이였다-그 허기를 표현하는 유난히 뚜렷한 방식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한번도 주어진 적이 없는 것을, 평범한 소비주의의 명랑하고 개방적인 교환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가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헛소리하지마, 난 도둑질 당했어, 그러니까 나도 도둑질로 보복할 거야라는 방식이다. 재닛과 캐슬린은 표현 수단은 다르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그것은 감정들이 자신을 너무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절실히 필요하고 자신의 몸에 비해 그 감정이 너무 크다는 느낌, 그러므로 그 느낌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애초에 그런 느낌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려는 강박이다.
335 이 모든 행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분노가 있다. 당신에게 마띵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나 많은 필요를 느끼게 했으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이었든 필요를 느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가장 강력한 슬픔도 자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이의 슬픔, 그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고 상처 입히는 아이의 슬픔.
337 통제력을 잃고 폭풍 쇼핑이나 폭식을 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물론 절박하고 공포로 전전긍긍하는 무서운 느낌이지만 그런 느낌들보더 훨씬 더 깊은 곳에는 아주 오래된 쓰라린 공허가, 너무 거대해서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커다란 구멍이, 당신이 사들이고 먹고 먹고 사들이는 와중에도 음식과 물건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위안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한테 못되게 구는 남자에게 집착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이 역시 무섭고 지치는 느낌이고 깊은 불안감이지만, 여기에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서 온 필사적으로 몰아가는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이 유발하는 낫고 싶은 갈망, 안기고 싶은 갈망, 필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 마침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증명받고 싶은 갈망이 있다. 그렇다면 굶는 건 어떤 느낌인가? 굶기에 관한 내 일차적이고 감정적인 기억은 불안과 고립, 납처럼 둔중한 차가운 인내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굶는 것은 결국 슬픔의 한 상태이며, 이는 필연적이다. 굶는 당시에는 굶기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이며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느껴지고, 자신이 정말 얼마나 허하고 굶주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지 표현할 유일한 방법, 자신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껴진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338. 알리는 것. 그것이 내 굶기의 목표이며, 너무나 조심스레 감춰져 있어서 자기 자신조차 모를 수 있는 숨겨진 의제다. 자해하는 이는 자기 존재의 중심에 있는 고통을 눈에 보이게 만들기 위해 칼로 긋는다. 거식증 환자는 자신의 허기와 취약성을 분명히 보이게 만들기 위해 굶는다. 극단적인 이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고, 이게 내가 느끼는 것이고, 이게 내가 필요한 걸 얻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들은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갈망에, 그러니까 인정받고 알려지고자 하는 욕망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서 또한 당신이 어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목소리를 부여한다. 또한 그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뿌리를 내리는 슬픔에도.
339 무언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허기가 우리를 압도할 때, 허기가 언어의 체계화 용량을 초과할 때다. 언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몸에 의지하게 되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몸의 행동과 강박과 충동을 허락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손으로 초코바 하나를 감싸쥔다. 자기 팔의 여린 피부에서 피를 뽑아낸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상징으로 재편성된 사물과 신체 부위와 음식의 세계들-이 세계들이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할당된 세계들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속에는 여성의 슬픔의 언어 전체가 감춰져 있다. 이 언어가 평범한 언어를 대신하고, 평범한 언어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마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묘사할 단어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360 나는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믿음, 감정에 관해 말하는 것이 그 감정들을 제거해주리라는 믿음을 마음 깊이 품고 자랐다. 내가 만난 치료사는 그것을 상당히 모호한 목표라고, 아니면 적어도 불완전한 목표라고 보면서 ’재미‘와 ’기쁨‘이라는 기이한 개념들에 아주 집요하게 파고든 사람이었던 것은 내게 대단한 행운이었다.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지만 말이다. 재미라고? 좋은 기분이라고? 나는 재미있고 싶지 않았고 재미에 관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361 그때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체중과 먹는 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될 것이며 평화로운 상태를 찾게 될 것이고 엄밀히 말해 음식을 최소한 먹어도 되는 자유는 느끼게 될 거라는 착각,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딱 맞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평화를 찾게될 거라는 착각, 그러면 내가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이 될 거라는 착각, 내 인생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형태와 형식에 끼워 맞출 수 있다면, 그러면 나도 정상적으로 느껴질 것이고 문제들은 해결될 거라는 착각.
362 치료사는 내 몸부림이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남자친구에 관한 것도 아니고, 그 주의 골칫거리에 관한 것도, 그 주의 백일몽에 관한 것도 아니며, 그건 모두 딴청을 부리려는 핑계와 가짜 희망들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해결책은 외현적 형태로, 즉 새 남자나 새 직업이나 샤르도네 와인으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진짜 몸부림은 나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진짜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내 몸 안에 존재해야 하며, 내 마음을 알아야 하고, 내 인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고, 바로 내가.
363 치료사는 나를 계속 못살게 굴고 옆구리를 찔러댔다. 멀쩡한 식사 한 끼를 남기지 말고 다 먹어봐요. 그럼 이제 한번 더 그렇게 먹어 봐요.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지켜보고, 통제력의 일부를 포기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지켜보라는 것이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하지 말아요. 그러면 그건 또 어떤 느낌이 드는지 지켜보고 그 모든 욕구 아래 있는 걸 느껴보라고 했다. 반려동물 들이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내가 상담치료를 시작한지 5년쯤 되었을 때 그가 이 질문을 했고, 나는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이라도 되는 양 그를 쳐다보았다. 걸음마를 내딛는 것은 고통스럽다. 멀쩡한 한 끼를 다 먹으면 당신이 얼룩처럼, 암소처럼 무가치하고 역겹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당신에게는 들여다볼 무언가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검토해야할 감정들이 남겨진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러면 집에 혼자 앉아 갈망과 공포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지만, 그래도 당신이 그 불편한 감정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364 세상일이 다 그렇듯 변화의 속도는 빙하의 움직임처럼 느릿느릿하고, 극적인 효과가 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운이 좋아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점차 조금씩 다른 영토로, 손톱만큼씩이라도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덜 가혹해지는 풍경으로 옮겨갈 것이다. 내 생각에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 깊은 관계가 있고, 통찰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쓸모가 없다. 내 식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을 것이고, 그때까지도 가족과 과거에 관해 한탄조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꺼이 할 마음-기꺼이 실험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끌을 집어들고 바위와 저항을 쪼아나가는 일에 동참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통찰은 상당히 공허할 수 있으며 그런 서사에는 행위가 없고 갈등도 별로 없으며 극도로 희미하게 남은 플롯의 윤곽만 있다.
365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막막함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믿음의 낱알이다. 당신은 아기처럼 한 걸음을 떼고 또 한 걸음을 옮긴다. 이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저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린다. 그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하면 그러는 사이 어디쯤에선가 자신이 공허함과 절망의 순간들을 지나 살아남을 수 있음을,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을, 공포 대신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믿음을 영적인 것으로 정의하든 아니든, 갓 생겨나기 시작한 이 믿음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호의적인 우주나 어떤 더 높은 힘이나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믿음이란 당신이 힘든 밤들을 견디게 도와주고 좋은 말을 음미하게 도와주는 신비로운 감정의 저수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 허기가 나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나에게 필요한 도움과 영양을 실제로 내가 찿아낼 수 있다는 걸, 내가 괜찮으리라는 걸 마음속에서부터 믿을 수 있다.
366 치료 초반에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만약 거식증의 감옥을 탈출해서 힘겹게 얻어낸 모든 통제를 정말로 놓아버리게 될 경우 욕구와 욕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먹는 걸 절대 멈출 수 없게 되리라는 생각,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너무 무서워서 나 자신을 다시 감옥에, 그것도 이번에는 경비가 가장 삼엄하고 훨씬 더 가혹한 간수가 딸린 감옥에 감금시키리라는 생각이었다. 요즘도 때때로 유난히 비관적이거나 암울한 기분이 들 때면 여전히 그런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고는 치료사에게, 사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조금 더 예쁜 물건들을 갖춘 더 넓은 감방을 지은 것뿐이라고, 똑같은 내부구조를 더 멋진 가구로 겉치장한 것일 뿐이라고 투덜댄다. 나는 여전히 고립의 시간에 잘 빠져들고, 여전히 내가 원하는 정도보다 바깥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쾌락과 위험을 기피한다. 여전히 욕구를 한껏 만족시키는 방향보다는 통제하고 최소화하는 방향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하지만 풍경은 실제로 과거보다 덜 황량해졌고 때로는 진정으로 푸르게 우거진 느낌이 든다. 그 풍경 안에는 사람들도 있다. 내 인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한 남자, 소중한 가족 몇 사람,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느껴지는 가까운 친구 몇 명, 치료사. 거기에는 음식도 있다. 함께 먹고 기쁨을 나누는 식사, 불안감 없이 마음껏 즐기는 디저트, 동물도 있다.
368 도대체 충분하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창조한 이 작은 풍경은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결코 충분해지지 않을지도, 어쩌면 충분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369 나는 반쯤 농담을 섞어 행복의 세 요소-좋은 정비공, 좋은 부인과 의사, 좋은 심리 치료사-를 꼽았고 몇 년간 그 공식을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 좋은 직업, 좋은 남자 친구, 좋은 아파트라고 수정했지만, 이 역시 다 갖추기 힘든 조합이다. 장난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 두 공식 모두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비공은 자유와 기동성을, 부인과 의사는 육체적 건강을, 치료사는 정서적 안녕을 대표하는데, 모두 건강하고 자유롭게 표현되는 욕구의 핵심 특징이다. 직업과 남자친구와 아파트의 조합도 구성은 비슷하다. 세 가지를 모두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기결단, 자기인식, 행운의 아주 드문 조합이 필요하다.
370 허기는 비록 불편하기는 해도 연료와 비슷하다. 우리가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들며, 그 작은 걸음마들을 하도록 힘을 주며,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새로운 영토로 우리를 떠밀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정신분석가 아버지와 화가 엄마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나 42세때 폐암으로 사망한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의 거식증 이야기 <욕구들: 여성은 왜 원하는가>에서 발췌한 부분들. 심리치료사와 오랜 관계를 통해 거식증에서 차츰 벗어나는 치료과정에 대한 묘사가 인상 깊은 책.
41 새 천 년의 초입에 많은 여성들의 마음속에 깔린 가장 주된 욕구는 아마 욕구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자신의 진짜 욕구가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전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싶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충분한 자격과 힘을 갖추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 말이다.
49 여성의 많은 행동(체중과 외모에 대한 집착, 명백한 자기파괴적 성향)은 하나같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병이라고 치부된 후 ’낮은 자존감‘의 폐품 더미에 던져지는 경향이 있다. 나는 항상 낮은 자존감이란 너무 빈약한 근거라고, 마치 넣어야 할 재료 중 열 가지를 빼고 끓인 묽디묽은 수프 같다고 느꼈다. 자기 신체에 능동적으로 해를 입히거나 억지로 자신을 굴복 상태에 몰아넣는 여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연애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여자, 인사불성으로 쇼핑을 하고 빚더미에 올라앉는 여자를 고통에 몰아넣는 것은 초라한 자아상 같은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낮은 자존감‘이라는 말은 좌절된 욕구에서 베어나오는 슬픔과 허함을 단 한 방울도 포착하지 못하며, 엉뚱한 대상으로 치환된 욕구에 동반되는 괴로움도, 욕망들이 그렇게 여러 방향의 잘못된 경로로 흘러가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또한 느껴야-할지 몰라서 겪는 고뇌도 좀처럼 포착하지 못한다.
56 그토록 기괴한 집착이 지닌 수많은 의미와 의도를 이해해보려 노력할 때, 내게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바로 그 차분함, 대양처럼 광대하면서도 도저히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던, 어떤 불안에서 해방된 것 같았던 느낌이다. 나는 수년간 매일 같은 음식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같은 시간에 먹었다. 음식에 관해 생각하고, 음식에 저항하고, 다른 사람들이 음식과 맺는 관계를 관찰하고, 내가 정해둔 티끌만 한 양의 음식에 탐닉하는 시간을 기대하는 등 이 모든 노력에 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쏟았다. 이렇게 협소하고 구체적이며 강박적인 엄격함은 내게 비할 데 없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59 거식증은 음식과 체중에 대한 집착을 거꾸로 뒤집고, 그 집착의 에너지를 음식의 준비와 제공과 소화가 아니라 음식 및 음식이 대표하는 모든 것, 즉 풍요와 풍성함과 돌봄을 회피하는 일로 돌림으로써 음식과 체중에 대한 여성의 전통적인 몰두를 무력화하는 한 방법이다.
315 나는 거식증을 놓아보내고 애도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뚜렷이 기억한다. 그것은 거식증이 주던 예측가능하지만 헛된 안전함의 상실 때문에 우는 것이며, 이는 사실 자기 자신, 바로 그런 안전함을 필요로 하며 굶는 것 외에는 안전함을 확보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불쌍하고 겁먹은 자신 때문에 우는 것이다.
317 거식증은 기본적으로 부인하는 상태, 배고픔을 부인하고 고통을 부인하고 감정을 부인하는 상태이지만 그 부인에는 아주 자주 균열이 생기고, 그러면 전력으로 닥쳐오는 허기의 위세를, 허함과 절망의 깊이를, 그 아픔의 막대함을 느끼게 된다.
318 치료사가 물었다. 거식증이 당신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했던 건가요? 그것으로부터죠,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건 바로 그 허함, 바로 그 절망과 실망의 강도, 바로 그 눈물, 항상 가까스로 흘리지 않고 버텨냈고 부인했고 굶음으로써 쫓아버렸던 그 눈물, 한마디로 슬픔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둘 다 잠시 침묵에 잠겼다. 아마 우리는 복잡하게 뒤섞인 이런저런 공통된 마음의 반응들에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여름날의 슬픔에 대한 존중, 슬픔으로부터 보호해줄 거라는, 유혹적이지만 순전히 환상일 뿐인, 굶기의 능력에 대한 이해, 슬픔이 뻗어나갈 수 있는 생각보다 더 넓은 범위와 슬픔이 영혼 속에서 끈질기게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대한 인정이 그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내가 느낀 아픔-외로움, 허함, 갈망-은 거식증 이전부터 존재했고 거식증과 나란히 공존했으며 거식증이 지나간 후에도 잔존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그저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다.
320 뭔가가 빠져 있어. 이 말은 그나마 내가 그 느낌을 설명하는데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것은 놓쳐버렸거나 좌절된 관계들에 대한, 한때 무언가 사랑스럽고 견고한 것이 존재했던 자리에 남겨진 거대한 공동에 대한 인식이다. 나는 이것이 그 허기의 대양, 욕구의 바다 바닥에 깔린 거친 모래알이라고, 그저 인간이기에 느끼는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328 어머니와 내 언니 오빠 사이에는 더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나는 체질적으로도 기질적으로도 아버지와 더 비슷했고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더 잘 맞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내가 매우 결정적인 측면에서 어머니의 원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이 얼마나 확실한지 혹은 안정적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329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머니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근원이 뭔지 몰라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나를 초조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만들고 씁쓸한 분노로 가득 채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이해하게 된 것, 혹은 다가가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분노 아래 깊이 흐르고 있던 슬픔이었고, 너무나 격렬해서 평범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도 없는 연결에 대한 갈망이었다.
329 그게 내가 굶었던 이유일까? 부분적으로만 그렇다. 굶기는 어머니와 관계된 것들 외에 더 많은 종류의 근원들에서 비롯되었고, 더 많은 목적에 기여했다. 비난을 모조리 어머니에게 돌리는 것은 문화나 미디어만 탓하는 것만큼이나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내게 특수한 종류의 허한 느낌을 남겼다고 생각하는데, 슬픔이 점점이 배어 있는 그 허한 감정은 결코 나에게만 있는 특유한 것이 아니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생겼고 기억이 닿을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먼 곳에 있는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들은 새로 내린 눈으로 덮여버린 발자국들과 같다. 그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춰지고 봉해지며, 괴로움을 느꼈던 흔적들을 알아보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허기 뒤에 자리한 슬픔은 행동으로 표출되는 경향이 있고, 명사들과 동사들 대신 상징과 암호로 묘사된다. 한 여자의 몸과 행동은 언어가 좀처럼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전달한다.
332 강박적 도둑질, 자해 폭식증은 서로 무관하고 전혀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징들에 깊이 의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전의 은밀하고 기괴하며 만족감과 죄책감 모두를 유발하는 도벽의 역사는 어떤 중심적인 박탈감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그 박탈감은 수전이 평범한 말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고 평범한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 감정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수전의 말이다. “그나마 박탈감이라는 단어가 좀 가까운 것 같아요. 무언가를 놓쳐버렸다는 느낌, 그리고 그 때문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는 느낌이요. 그건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것이 알고보면 얼토당토않은 립스틱이나 초코바라고 해도 말이에요.”
332-333 제닛의 폭력적이며 꼭 필요한 일인 것만 같은 자해는 그와는 반대되는 느낌을 전달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권리가 없다는 감정, 권리가 없다는 느낌에 대한 깊은 괴로움이다. 자기 살을 베는 행동에 이르게 된 마음의 틀을 묘사할 때 재닛은 풍선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건 마치 내 몸 전체가 너무 부풀어 올라서 터질 것 같은,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인 느낌이고, 그 감정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은 나를 베는 거예요. 피로 흘려 보내는 거죠.” 물론 그 부풀었다는 느낌은 물리적 체중보다는 감정적 무게에 관한 것이다. “필요한 것, 원하는 것, 불안, 글쎄요, 감정들이에요. 존재하는 모든 감정, 아무 감정이나 가져다 대고 다 맞아요. 나는 자해가 게워내는 것과 많이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 충동은 아주 거대해요. 그냥 그걸 제거해버리려는 충동,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이든 그걸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제거해버리려는 것이죠.”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335 수전은 특수한 허기의 감각을 갖고 성장했고-한번도 충분한 포만감을 느낀 적이 없고 한번도 자신이 남들과 똑같이 먹여질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 아이였다-그 허기를 표현하는 유난히 뚜렷한 방식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한번도 주어진 적이 없는 것을, 평범한 소비주의의 명랑하고 개방적인 교환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가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헛소리하지마, 난 도둑질 당했어, 그러니까 나도 도둑질로 보복할 거야라는 방식이다. 재닛과 캐슬린은 표현 수단은 다르지만 표현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그것은 감정들이 자신을 너무 가득 채우고 있다는 느낌, 너무 배가 고프고 너무 절실히 필요하고 자신의 몸에 비해 그 감정이 너무 크다는 느낌, 그러므로 그 느낌들을 방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애초에 그런 느낌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벌하려는 강박이다.
335 이 모든 행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분노가 있다. 당신에게 마띵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너무나 많은 필요를 느끼게 했으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엇이었든 필요를 느꼈던 자신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 아래에는 가장 강력한 슬픔도 자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했다고, 자신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아이의 슬픔, 그 때문에 자신을 비난하고 상처 입히는 아이의 슬픔.
337 통제력을 잃고 폭풍 쇼핑이나 폭식을 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물론 절박하고 공포로 전전긍긍하는 무서운 느낌이지만 그런 느낌들보더 훨씬 더 깊은 곳에는 아주 오래된 쓰라린 공허가, 너무 거대해서 당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커다란 구멍이, 당신이 사들이고 먹고 먹고 사들이는 와중에도 음식과 물건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다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위안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자기한테 못되게 구는 남자에게 집착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이 역시 무섭고 지치는 느낌이고 깊은 불안감이지만, 여기에도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데서 온 필사적으로 몰아가는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이 유발하는 낫고 싶은 갈망, 안기고 싶은 갈망, 필요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 마침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증명받고 싶은 갈망이 있다. 그렇다면 굶는 건 어떤 느낌인가? 굶기에 관한 내 일차적이고 감정적인 기억은 불안과 고립, 납처럼 둔중한 차가운 인내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굶는 것은 결국 슬픔의 한 상태이며, 이는 필연적이다. 굶는 당시에는 굶기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이며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느껴지고, 자신이 정말 얼마나 허하고 굶주리고 공포에 질려 있는지 표현할 유일한 방법, 자신을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껴진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338. 알리는 것. 그것이 내 굶기의 목표이며, 너무나 조심스레 감춰져 있어서 자기 자신조차 모를 수 있는 숨겨진 의제다. 자해하는 이는 자기 존재의 중심에 있는 고통을 눈에 보이게 만들기 위해 칼로 긋는다. 거식증 환자는 자신의 허기와 취약성을 분명히 보이게 만들기 위해 굶는다. 극단적인 이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고, 이게 내가 느끼는 것이고, 이게 내가 필요한 걸 얻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들은 가장 핵심적인 인간의 갈망에, 그러니까 인정받고 알려지고자 하는 욕망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서 또한 당신이 어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목소리를 부여한다. 또한 그 갈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뿌리를 내리는 슬픔에도.
339 무언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허기가 우리를 압도할 때, 허기가 언어의 체계화 용량을 초과할 때다. 언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다시 몸에 의지하게 되고, 우리가 느끼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하려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몸의 행동과 강박과 충동을 허락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손으로 초코바 하나를 감싸쥔다. 자기 팔의 여린 피부에서 피를 뽑아낸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상징으로 재편성된 사물과 신체 부위와 음식의 세계들-이 세계들이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할당된 세계들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속에는 여성의 슬픔의 언어 전체가 감춰져 있다. 이 언어가 평범한 언어를 대신하고, 평범한 언어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마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묘사할 단어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360 나는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믿음, 감정에 관해 말하는 것이 그 감정들을 제거해주리라는 믿음을 마음 깊이 품고 자랐다. 내가 만난 치료사는 그것을 상당히 모호한 목표라고, 아니면 적어도 불완전한 목표라고 보면서 ’재미‘와 ’기쁨‘이라는 기이한 개념들에 아주 집요하게 파고든 사람이었던 것은 내게 대단한 행운이었다.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지만 말이다. 재미라고? 좋은 기분이라고? 나는 재미있고 싶지 않았고 재미에 관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361 그때 나는 모든 집착에 따라붙는 전형적인 착각, 즉 욕망의 대상을 문제가 아닌 해결책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체중과 먹는 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나머지는 따라서 해결될 것이며 평화로운 상태를 찾게 될 것이고 엄밀히 말해 음식을 최소한 먹어도 되는 자유는 느끼게 될 거라는 착각,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게 딱 맞는 남자가 나를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평화를 찾게될 거라는 착각, 그러면 내가 세련되고 성숙하고 침착한 사람이 될 거라는 착각, 내 인생을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형태와 형식에 끼워 맞출 수 있다면, 그러면 나도 정상적으로 느껴질 것이고 문제들은 해결될 거라는 착각.
362 치료사는 내 몸부림이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남자친구에 관한 것도 아니고, 그 주의 골칫거리에 관한 것도, 그 주의 백일몽에 관한 것도 아니며, 그건 모두 딴청을 부리려는 핑계와 가짜 희망들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해결책은 외현적 형태로, 즉 새 남자나 새 직업이나 샤르도네 와인으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진짜 몸부림은 나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진짜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내 몸 안에 존재해야 하며, 내 마음을 알아야 하고, 내 인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걸 그만둬야 한다고, 바로 내가.
363 치료사는 나를 계속 못살게 굴고 옆구리를 찔러댔다. 멀쩡한 식사 한 끼를 남기지 말고 다 먹어봐요. 그럼 이제 한번 더 그렇게 먹어 봐요.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지켜보고, 통제력의 일부를 포기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지 지켜보라는 것이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하지 말아요. 그러면 그건 또 어떤 느낌이 드는지 지켜보고 그 모든 욕구 아래 있는 걸 느껴보라고 했다. 반려동물 들이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내가 상담치료를 시작한지 5년쯤 되었을 때 그가 이 질문을 했고, 나는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이라도 되는 양 그를 쳐다보았다. 걸음마를 내딛는 것은 고통스럽다. 멀쩡한 한 끼를 다 먹으면 당신이 얼룩처럼, 암소처럼 무가치하고 역겹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당신에게는 들여다볼 무언가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검토해야할 감정들이 남겨진다.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지 않는다. 그러면 집에 혼자 앉아 갈망과 공포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지만, 그래도 당신이 그 불편한 감정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364 세상일이 다 그렇듯 변화의 속도는 빙하의 움직임처럼 느릿느릿하고, 극적인 효과가 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운이 좋아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점차 조금씩 다른 영토로, 손톱만큼씩이라도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덜 가혹해지는 풍경으로 옮겨갈 것이다. 내 생각에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 깊은 관계가 있고, 통찰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쓸모가 없다. 내 식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나는 아흔 살이 되어서도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을 것이고, 그때까지도 가족과 과거에 관해 한탄조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꺼이 할 마음-기꺼이 실험하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끌을 집어들고 바위와 저항을 쪼아나가는 일에 동참하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통찰은 상당히 공허할 수 있으며 그런 서사에는 행위가 없고 갈등도 별로 없으며 극도로 희미하게 남은 플롯의 윤곽만 있다.
365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막막함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믿음의 낱알이다. 당신은 아기처럼 한 걸음을 떼고 또 한 걸음을 옮긴다. 이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저 작은 벼랑에서 뛰어내린다. 그 일을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하면 그러는 사이 어디쯤에선가 자신이 공허함과 절망의 순간들을 지나 살아남을 수 있음을, 고통을 기쁨으로 상쇄할 수 있음을, 공포 대신 안전함을 느낄 수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 믿음을 영적인 것으로 정의하든 아니든, 갓 생겨나기 시작한 이 믿음을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호의적인 우주나 어떤 더 높은 힘이나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든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믿음이란 당신이 힘든 밤들을 견디게 도와주고 좋은 말을 음미하게 도와주는 신비로운 감정의 저수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있으면 허기가 나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걸, 나에게 필요한 도움과 영양을 실제로 내가 찿아낼 수 있다는 걸, 내가 괜찮으리라는 걸 마음속에서부터 믿을 수 있다.
366 치료 초반에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내가 만약 거식증의 감옥을 탈출해서 힘겹게 얻어낸 모든 통제를 정말로 놓아버리게 될 경우 욕구와 욕망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먹는 걸 절대 멈출 수 없게 되리라는 생각,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너무 무서워서 나 자신을 다시 감옥에, 그것도 이번에는 경비가 가장 삼엄하고 훨씬 더 가혹한 간수가 딸린 감옥에 감금시키리라는 생각이었다. 요즘도 때때로 유난히 비관적이거나 암울한 기분이 들 때면 여전히 그런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고는 치료사에게, 사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조금 더 예쁜 물건들을 갖춘 더 넓은 감방을 지은 것뿐이라고, 똑같은 내부구조를 더 멋진 가구로 겉치장한 것일 뿐이라고 투덜댄다. 나는 여전히 고립의 시간에 잘 빠져들고, 여전히 내가 원하는 정도보다 바깥 세상을 더 두려워하고 쾌락과 위험을 기피한다. 여전히 욕구를 한껏 만족시키는 방향보다는 통제하고 최소화하는 방향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하지만 풍경은 실제로 과거보다 덜 황량해졌고 때로는 진정으로 푸르게 우거진 느낌이 든다. 그 풍경 안에는 사람들도 있다. 내 인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한 남자, 소중한 가족 몇 사람,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느껴지는 가까운 친구 몇 명, 치료사. 거기에는 음식도 있다. 함께 먹고 기쁨을 나누는 식사, 불안감 없이 마음껏 즐기는 디저트, 동물도 있다.
368 도대체 충분하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창조한 이 작은 풍경은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결코 충분해지지 않을지도, 어쩌면 충분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369 나는 반쯤 농담을 섞어 행복의 세 요소-좋은 정비공, 좋은 부인과 의사, 좋은 심리 치료사-를 꼽았고 몇 년간 그 공식을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 좋은 직업, 좋은 남자 친구, 좋은 아파트라고 수정했지만, 이 역시 다 갖추기 힘든 조합이다. 장난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 두 공식 모두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비공은 자유와 기동성을, 부인과 의사는 육체적 건강을, 치료사는 정서적 안녕을 대표하는데, 모두 건강하고 자유롭게 표현되는 욕구의 핵심 특징이다. 직업과 남자친구와 아파트의 조합도 구성은 비슷하다. 세 가지를 모두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기결단, 자기인식, 행운의 아주 드문 조합이 필요하다.
370 허기는 비록 불편하기는 해도 연료와 비슷하다. 우리가 계속 무언가를 추구하게 만들며, 그 작은 걸음마들을 하도록 힘을 주며,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새로운 영토로 우리를 떠밀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 충분한가? 완전한 확신을 갖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과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