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리뷰
영화 “굿윌헌팅”의 증상진단과 전이분석
크레도
2020-07-10
2020-07-10 14:23:39
영화 “Good Will Hunting” 증상진단과 전이분석
-라캉과 현대정신분석의 증상진단 및 전이개념을 중심으로-
-라캉과 현대정신분석의 증상진단 및 전이개념을 중심으로-
전서연
Ⅰ. 서론
이 글의 목적은 영화 <굿윌헌팅>의 주인공 윌(맷 데이먼)의 증상진단 및 분석가 숀(로빈 윌리엄스)과 관계에서 일어난 전이 현상을 라캉의 전이개념과 현대정신분석의 자기애적 전이개념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해보고 두 입장의 차이를 정리해보는 것이다.
라캉의 임상이론에서 전이는 분석가를 ‘(환자의 무의식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sujet suppose savoir'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환자는 자유연상하며 분석가가 자신의 무의식을 알고 해석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이때 분석가는 환자가 찾는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으로, 애정의 대상이 된다. 전이성 애정은 본질적으로 거짓이며 무의식을 닫는 역할을 한다. 전이로 닫힌 환자의 무의식을 분석가는 해석을 통해 다시 열어보이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굿윌헌팅>의 윌은 스스로 분석가를 찾아오지도 않았고 분석가를 자신의 무의식을 알고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가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라캉적 의미의 전이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윌을 강박증자라고 진단한다면, 타인의 도움 없이 혼자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강박증상 때문에 생겨난 강박증 특유의 전이가 펼쳐진 거라고 볼 수 있다. 즉, 윌과 숀의 분석은 라캉이 말한 ’예비면담‘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윌이 분석가 숀이라는 타인의 욕망을 대면한 후, 분석가가 텅 빈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이른바 ’본격적인 분석‘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분석과 영화가 끝나는 것은 강박증자와 분석할 때 라캉학파 분석가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상황 중의 하나인 것 같다.
현대정신분석 관점에서 윌의 증상은 경계선 수준의 자기애적 성격으로 진단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자기애적 성격의 환자와 분석할 때 나타나는 전이는 일반적으로 자기애적 전이(Narcissistic Transference)에서 대상 전이(Object Transference)로 발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Hyman Spotnitz(1969)에 따르면 자기애적 전이는 환자가 분석가를 자기와 같거나 자기와 융합된 존재로 인식하는 상태를 지칭하며, 그 단계가 지나면 환자는 분석가를 자기와 다른, 자기 바깥에 있는 한 사람으로 경험하는 대상 전이로 옮겨가게 된다고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굿윌헌팅>의 전이는 자기애적 전이 상태가 이어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야 대상 전이로 옮겨가게 되며, 그 시점에서 분석도 영화도 종결되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Ⅱ. 본론
1. 라캉적 관점의 증상진단과 전이분석
⑴ 다루기 힘든 강박신경증
라캉은 신경증-도착증-정신증 3가지 분류를 사용하기 때문에 경계선boderline이란 진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심리치료에서 경계선이라고 진단받는 환자들 대부분은 다루기 힘든 신경증자일 뿐이며, 특정한 진단명으로 범주화할 수 없는 모호한 환자들을 경계선으로 통칭하는 심리치료의 관행들은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분석가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굿윌헌팅>의 주인공 윌은 라캉식으로 진단하면 다루기 힘든 신경증자에 해당하며 무의식적인 충동들이 억압된 존재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된 것들은 꿈, 망각, 말실수, 농담, 실수로 위장된 우연한 행위, 증상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윌은 우연히 대학교수가 낸 수학문제를 풀거나, 순간적으로 욱해서 사람을 폭행하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이는 윌이 무의식에 억압된 자신의 충동을 알지 못한 채 살다가 우연을 가장한 행위로 그것을 표출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억압했던 분노를 타인에게 투사 혹은 전치해서 행동화acting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윌은 억압된 감정들을 강박적인 생각 속에 가두는 강박증자에 해당한다.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라거나 ‘지적인 이야기로 상대를 압도하거나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으면 내가 당할 것’이라거나 ‘관계가 깊어지면 상대에 대한 애증을 감당하지 못해 관계가 파탄날 것’이라는 등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라캉에 의하면 강박증자는 자신이 무언가를 결여한 존재임을 느끼게 된 이후 자신을 보충할 수 있을 만한 대상을 환상 속에서 추구한다. 윌은 고아이기 때문에 ‘나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얻기 위한 재료인 엄마의 젖가슴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입양되었다가 학대를 받아 파양되기를 반복한 과거만 잠깐 언급될 뿐이다. 윌에게 결여된 엄마의 자리는 매우 커서 그에 상응하는 환상은 거대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 빈 곳을 방대한 지식으로 채우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탐독하고 모든 난제를 풀 수 있는 전능에 가까운 그의 능력은 결여된 엄마를 채우기 위한 강박적인 대체물이자 그의 전능환상을 이루는 뼈대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현실적인 성취를 이룰 마음이 없고 상상계적인 만족을 주는 친구들과 함께 지리멸멸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것은 엄마에게 버림받았듯 또다시 누군가에게 버림받을지 모르는 공포가 너무 커서 자신을 버릴 가능성이 없는 동네 친구들과 유대 속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환상을 추구하며 외부 세계와 관계 맺지 않고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또는 아버지에게 학대 받은 기억으로 인해 자신과 타인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자기 내부의 파괴적 공격충동을 방어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대상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강박적인 태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강박증자는 대상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며, 타자의 존재와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를 무화시키고 중화시키려고 애쓰는 윌은 외부의 타자나 대상이라고 볼 수 없는, 자신의 분신 같은, 쌍둥이 같은 대상인 처키(벤 애플렉)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과만 유대관계를 맺을 뿐 다른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 무심하다. 정신과 의사 숀과 만난 윌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한다. 관계를 맺게 되면 그것에 따라오는 다양한 감정의 회오리를 감당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윌은 일부러 숀을 자극해서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든다. 세상에 대해 화가 난 사람은 윌 자신이면서 숀에게 화를 투사해 숀이 화내고 공격하게 하고는 무의식적인 파괴적 공격충동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화가 난 대상이 자신을 버리도록 만들고 자신은 버림받은 아이로 남게 되는 역동은, ‘엄마가 떠나고 아빠가 때린 건 내가 못나고 부족한 탓’이라는 자신의 굳은 신념을 현실화하는 무의식적 반복행위이다.
⑵ 상상계적 전이
강박증자 윌은 타자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라고 믿으며 자신을 완전한 주체라고 생각한다. 억압된 무의식을 무시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한순간도 자신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의식적인 주체로 남고자 한다. 대상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주체가 분열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아파니시스aphanisis)때문에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타자가 자신을 통해 주이상스를 얻는 것을 거부한다.
수학교수가 자기를 사용해 주이상스를 얻는 것을 거부하며, 스카일라가 자신과 함께 미래를 꿈꾸고 싶다는 제안을 거부하며, 숀이 자신의 아파니시스를 건드릴까봐 선제공격을 감행하며 숀의 주이상스의 원인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내적 타자인 초자아에게 주이상스를 넘겨준다. 즉 자신이 타자의 주이상스의 원인이 되기를 거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도 모르게 대타자, 아버지의 이름, 상징적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주이상스를 희생하게 되는 것이다. 외적인 타자와 관계에서 얻어지는 만족감을 희생해서 보다 높은 이상(대타자나 초자아)을 추구하는 주체가 되려고 한다. 대타자 자체가 되려는 것이다. 그래서 강박증세가 심하면 심할수록 환자는 보다 완강히 분석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하면 분석에 참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징적 타자로 표상되는 지식의 담지자인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윌도 그렇다. 자신은 정신과 치료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타자가 어떻게든 자신의 주이상스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치료사 5명의 도움을 거절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쌓은 숱한 지식들을 토대로 스스로 자기분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고 자기 힘으로 자신의 무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타자로부터 독립된 주체라고 굳게 믿는 강박증자 윌이 분석가 숀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발적인 의지에서가 아니라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서이다. 비자발적으로 마지못해 분석에 임하는 강박증자가 분석관계를 오래 지속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강박증자가 자발적으로 분석에 오는 경우는 우연한 기회에 타자의 욕망과 마주쳐서 충격에 빠지거나 주체가 분열될 것 같은 불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강박증자는 더 이상 타자를 무화시키거나 중화시킬 수 없으며 자신이 타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윌은 숀과 처음 만났을 때 숀을 타자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고 도움 받을 생각 자체가 없었으며 주이상스의 원인으로 사용되기를 거부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지식과 능력을 사용해 숀을 물리치기에 급급했다. 처음에 윌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보였고 숀은 궁지에 몰린 것처럼 여겨졌으며 윌은 분석가의 도움이 필요치 않는 단독적인 주체로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숀은 분석가를 거부하는 윌에게 강박증자에게 가장 필요한 분석적 전략, 즉 타자의 욕망과 대면하게 하는 전략을 쓴다. 숀은 윌이 판을 주도하며 타자를 지워버리려는 책략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욕망을 가진 존재이며 피와 살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임을 상기시키는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윌에게 타자의 욕망을 맞딱뜨리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권위를 대표하는 인물에게 노여움을 부추기는 강박증자의 전략은 죄의식을 느껴서 타자로부터 처벌받기 위한 것이다. 이는 윌이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겪었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숀의 인간적인 감정을 날 것으로 대면한 윌은 타자의 욕망을 만나는 충격을 받고 다음 분석시간에도 오게 된다. 하지만 라캉에 따르면 숀이 보인 인간적인 반응으로 인해 윌은 분석가 또한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분석가를 통해 분석주체의 자기-이미지를 확인하는 것에 지배되는 <상상적 관계>에 빠질 수 있다. 상상적 관계는 분석가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고 분석 상황의 최종 권위가 분석가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인격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서 ‘역전이countertransference’ 현상이 생겨난다. 라캉은 역전이를 멀리해야 한다고 보았고 역전이를 분석주체에게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만약 분석가가 역전이를 드러내면 분석가와 분석주체는 동일한 수준에 위치하게 되고, 각각은 서로 상대방의 상상적 타인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비슷한 감정, 비슷한 고민거리, 비슷한 불안감을 갖게 되며, 이는 분석주체가 분석가를 상징적인 큰 타자의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고 본다.
윌이 두 번째 분석을 받으러 왔을 때 숀은 윌을 데리고 호숫가로 나간다. 그리고 윌에게 말한다. ‘너는 지적인 텍스트만 읊조릴뿐 사람의 진짜 감정이 뭔질 모르며 사랑하는 여인과 주고받는 진실한 느낌이 어떤 건지 모르는 오만한 어린애에 불과하다, 나는 너보다 더 깊은 감정들을 맛봤고 더 넓은 세계를 경험했다, 사람과 관계가 어떤 건지도 모르는 녀석이 내 아픔을 다 아는 것처럼 난도질하다니, 너 고아지? 책의 저자들 이야기나 지껄일 게 아니라 네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너를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선택해라...’ 첫시간에 윌의 자극에 분노가 폭발한 숀이 자신의 화를 이리저리 곱씹은 끝에 도달한 자기성찰을 쏟아내는 대목으로 ‘네 스스로 분석을 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너는 언제까지나 두려움에 쌓인 어린애로 살아갈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성 제안이다. 정신과 의사나 분석가라기보다 상처 입은 한 개인 또는 인생 선배로서 ‘너 그렇게 살다 X된다’라고 훈계하는 느낌이다. 나이든 남자 어른을 공격해 노여움을 사게 만들었다는 윌의 죄책감은 그 조언을 일종의 ‘권위자로부터 처벌’이라 여겨 시원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숀이 윌에게 펀치를 되돌려준 덕분에 두 사람은 펀치를 한번씩 주고받은 셈이 되고 그로 인해 윌은 자기가 했던 공격이 면죄부를 받았다고 느껴 처음과 달리 숀에게 인간적인 유대를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라캉적인 입장에서 보면 숀의 말은 ‘역전이를 드러내 분석가와 분석주체를 상상계적 관계에 묶어두는’ 장면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상상적인 관계 속에 빠지면 분석가는 분석주체에게 자신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이려고 하고,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고 할 것이라는 라캉의 우려가 현실화된 장면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이 맺은 상상적이고 인간적인 유대의 결과 “네 잘못이 아니”라는 숀의 전언을 오픈 마인드로 수용할 수 있게 된 윌은, 비적응적인 신념체계(“관계가 깊어지면 상대에 대한 애증을 감당하지 못해 관계가 파탄날 것” 등)를 내려놓고 두려워하던 변화를 선택한다. 숀이라는 타자의 욕망을 대면한 강박증자 윌은 원하면서도 두려워서 거부해버린 스카일라라는 타자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윌은 이제 예비면담을 벗어나 카우치에 누워 본격적인 분석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단지, 숀이 개인적인 부분을 많이 오픈하고 역전이를 많이 사용해 맺게 된 상상적인 관계의 측면이 있어서 두 사람이 나중에 따로 남자 대 남자로 만나 인간적인 유대를 이어갈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다시 분석적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치료적이지 않겠다는 느낌이 든다. 윌이 다시 분석을 이어간다면, 안다고 가정된 주체이자 텅 빈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대타자를 넘어 환상을 가로지르는 상징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가와 하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2. 현대정신분석적 관점의 증상진단과 전이분석
⑴ 경계선 수준의 자기애적 성격
현대정신분석은 병리의 정도에 따라 정신증 수준 - 경계선 수준 - 신경증 수준이라는 진단범주를 사용해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경계선 수준의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은 분열, 부인, 투사, 투사적 동일시 같은 원시적 방어를 사용하고, 양가감정과 모순에 시달리며 모호함을 인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이들은 분석가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며, 상처받거나 비난받지 않는 것에 매달린다. 자신의 병리를 관찰자 입장에서 보는 관찰자아가 거의 없고 정체성이 혼란스러우며 통합되어 있지 않다. 이들의 정체성이 통합되는 토대가 생기려면 최소 2,3년에 걸친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분석작업이 필요하다.
자기애적 성격은 겉보기에 심하게 퇴행되어 있지 않고 불안도도 높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잘 기능하는 사람이 많다. 몇몇 자기애적 성격은 예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소유하거나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경우도 많다. 이들은 타인의 감정을 거의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전능환상 속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타인을 불신하고 경멸하며 평가절하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의존할 수 없다. 구강기적 공격성이 강하다. 오만하고 통제적이며 냉소적이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시기한다. 슬픔 및 애도와 관련된 진실한 감정이 부족하다. 자신에 대한 거대환상과 오만함 뒤에는 자신이 매우 불안정하고 열등하다고 느끼는 모순적인 감정이 존재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밖에 버려져 있는 가치없고 빈곤하며 공허한 존재로 평가절하하며, 무가치함과 자기비하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이 대단하고 중요한 인물이라는 식의 전능환상을 만들어 낸다. 완벽함에 대한 요구 때문에 인간 존재의 부족함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이 없다. 이들의 가장 큰 공포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의지한다는 것은 증오하고 시기하게 되는 것이고 이용당하고 혹사당하며 좌절될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경험된다. 분석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총력을 기울이다가 의지한다고 느끼게 되면 유아기적 결핍 상황으로 되돌아가 공허해지고 분노하며 공격받을까봐 두려움에 떤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분석가를 시기하고 증오하며 불신해 공격적으로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윌은 강박적인 방어를 사용하는 경계선 수준의 자기애적 성격으로 보인다. 타인의 완벽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단점이 상대에게 알려지면 상대가 자신에게 실망해 관계가 깨질 거라는 두려움이 크다.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을 향한 공격성과 파괴충동이 강하며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대상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버림받을까봐 두려워 타인에게 의존하지 못하고 오만함과 냉소와 허세로 자신을 방어한다.
⑵ 자기애적 전이
자기애적 성격의 환자는 분석가를 청중이나 관객으로 이용하려는 전이가 특징이다. 그들은 분석가가 독립적인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몇 달, 몇 년을 보내기도 한다. 즉, 분석상황에서 대상 전이가 아닌 자기애적 전이(혹은 자기대상 전이)가 오랜 기간 나타난다. 그동안 분석가는 분석에서 자신의 존재가 무화되는 무력하고 공허한 느낌을 인내심을 가지고 견뎌야 한다. 자기애적 전이가 훈습이 되고 대상 전이로 이행하게 되면 비로소 정신분석적인 치료기법을 사용해 분석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들은 분석가를 패배시키려고 한다. 좋아졌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기 때문인데, 좋아졌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환자는 분석가에게서 뭔가 좋은 것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의 기본적인 공격성에 대해서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석 내내 한편으로는 거대자기와 전능환상에 몰입되어 분석가라는 타자에게 무관심한 전이와 다른 한편으로는 분석가를 향한 원시적이고 공격적이며 편집적인 공포를 투사하는 전이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현대정신분석적 관점으로 윌과 숀의 관계를 보면, 처음에 윌은 숀을 분석가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다른 감정을 지닌 타자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분석 자체를 비하하고 폄하하기에 바쁜 자기애적 전이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만의 상처와 전능환상 속에서 타인의 세계를 불신하고 세상을 증오하며 눈 앞에서 도움을 거절하는 반항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 예이다. 윌은 숀의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계 맺기를 처음부터 거절할 궁리만 한다. 그에게 친밀한 관계란 어머니처럼 자신을 버리거나, 아버지처럼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연상시키므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에게 공포와 분노와 무력함 등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적극적으로 피해야할 무엇이다. 그리하여 윌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공포와 분노를 숀에게 투사하고 동일시해서 숀이 자신을 증오해 화를 폭발하도록 하고 화가 난 숀이 결국엔 자신을 버리도록 만든다. 윌의 투사적 동일시에 걸려든 숀은 윌이 투사한 대상으로 행동하는 역전이 행동화를 통한 역할재현(enactment)을 하게 된다.
역전이와 거리를 두는 라캉의 입장과 다르게 현대정신분석적 관점은 분석가의 역전이를 환자를 치료하는 유용한 도구로 여긴다. 분석가의 역전이는 크게 객관적Objective 역전이와 주관적Subjective 역전이로 나뉜다. 객관적 역전이는 분석가에게 전달되는 환자의 전이적 느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고, 주관적 역전이는 환자의 전이에 의해 일어나는 감정이 아닌 분석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슈와 관련된 감정이 분석상황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객관적 역전이는 분석작업에 도움을 주는 치료적인 측면이 강해서 개입기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관적 역전이는 역전이 저항을 일으켜 분석작업을 퇴행시키거나 정체시키므로 개인 분석작업을 필요로 한다. 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숀의 행동은 숀의 개인적인 사건과 관련된 분노를 표출한 것이긴 하지만 환자가 분석가에게 무의식적인 투사적 동일시로 주입한 감정에 따라 역할재현을 한 것이므로 객관적 역전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역할재현이 일어난 후 숀은 분석가로서 acting을 한 것에 대해 좌절하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럴 때 보통 슈퍼바이저를 만나 숀이 벌인 역전이 행동화를 통해 어떻게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할 것인지, 어떻게 치료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감독을 받는 게 일반적이지만 전문적인 영역이라서 영화에서는 빠진 듯하다. 숀은 아마도 자신이 경험한 역전이 행동화를 통해 윌이 학대받는 과정에서 경험했을 역동을 간파하고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는 오만하고 냉담한 모습 뒤에 감춰진 공포에 오그라든 어린아이를 만나 그 아이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따뜻하고 부드럽게 안아주는 분석가 역할을 하는 대신, 아버지 같은 사람에게 공격을 유발한 죄책감 때문에 처벌 받기를 원하는 윌의 마음을 미러링mirroring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지마라’는 식의 toxic한 반응으로 되돌려준 듯하다. 숀이 만약 윌에게 따뜻하고 부드럽게 반응했다면 윌은 그런 반응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숀을 신뢰할 수 없는 가짜나 사기꾼이라고 느꼈거나 ‘저렇게 따뜻하고 좋은 사람에게 화를 내도록 자극했다니 내가 나쁜 사람이다’ 라는 죄책감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결국 분석을 지속하기로 선택한 윌은 분석에 와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함구한다. 언어로 자유연상하는 talking cure인 정신분석에 대해 침묵으로 저항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분석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는 분석가의 노력을 좌절시키는 무언의 행동이며, 적극적인 공격성 표출이 먹히지 않자 침묵이라는 수동적인 방법으로 태세를 전환해 분석적 틀 자체를 공격하는 시위행동이다. 그런 수동공격에 대해 숀은 다시한번 미러링 기법을 사용해 똑같이 침묵으로 반응한다. 윌은 침묵하면서도 계속 숀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한다. 윌의 침묵은 결국 숀이 자신의 능동적, 수동적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인지, 그래서 자신의 공격성을 편하게 드러내도 안전한 대상인지 시험하는 일종의 테스트인 셈이다. 지루한 침묵을 견디다못해 숀이 졸기 시작하자 윌은 침묵을 깨고 첫 만남에서 키스한 스카일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매력적이고 근사한 여자지만 자주 만나면 판타지가 깨질 게 뻔해서 연락하지 않았다고 허세를 부리는 윌을 보고 숀은 여자의 완벽하지 않음이 아니라 본인의 완벽하지 않음이 드러날까봐 겁이 나서 연락하지 않은 거라고 해석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뀐 방귀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던 옛 아내 이야기와 함께 인간적인 사소한 허점들이 얼마나 관계에서 소중한 것인지, 들려준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도 다 완벽하지 않으므로 완벽한 사람 만나려면 사람 못 만난다는 조언을 해주는 분석가 숀. 전능환상 속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윌에게 그런 조언은 정말 값진 것이지만 타자의 존재를 병풍으로 사용하는 자기애적 전이 상태의 환자들에겐 공격으로 오인될 여지가 있는 조금은 위험한 접근이기도 하다. 하지만 숀은 늘 윌과 분석에서 안전한 방법이 아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非동조적인 방식의 미러링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반사회성 성향이 강한 자기애 환자인 윌에게 꼭 필요한 홀딩을 제공한다.
윌은 다시 스카일라와 데이트를 하고 친구들에게도 소개한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이 없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며 스카일라가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갈 때 같이 가자는 제의를 거절한다. 스카일라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한번도 보스턴을 떠나본 적이 없는 데다 처키를 비롯한 친구들을 떠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하는 여성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날 때부터 엄마에게 버림받은 윌에게 그런 관계란 버림 받고 학대받는 지옥 문이 열리는 것과 다름 없는 공포이자 트라우마다. 윌의 거절에 스카일라는 홀로 떠나고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눈 앞에서 놓친 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게 뭔 대수라고’ 식의 태도로 자신의 감정을 방어한다. 숀 앞에서 ‘목동이나 되겠다’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굴다가 쫓겨나기도 한다. 이제 윌은 자신의 두려움이 만든 현실을 정신승리하면서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에게 설득시켜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처키와 다시금 일용직 노동일을 하면서 ‘난 평생 여기서 너랑 살거야’라고 말하지만 처키는 ‘당첨될 복권을 깔고서 겁이 나서 열어보지도 못하는 놈’이라고 일갈하며 능력 없는 친구들 모욕하지 말고 조용히 떠나서 살 길 찾으라는 조언을 한다. 처음 듣는 친구의 거절에 윌은 버려질까 두려워 아무 것도 이루려하지 않고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비겁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분석가 숀 또한 자신과 비슷한 학대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학대 경험과 손상된 애착으로 인한 유기불안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숀에게 털어놓고 공감을 받은 윌은 버림받을까봐 두려워서 미리 관계를 끊는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고 스카일라도 그래서 놓쳤음을 알게 된다. 낙담한 윌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숀의 진심어린 위로에 마침내 마음을 열고 오열하면서 숀의 품에 안긴다. 윌은 이제 불신을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의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애적 성격의 가장 큰 이슈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숀과 만남을 통해 단기간에 일어난 윌의 변화는 매우 큰 치료적 전진이다. 이제 윌은 숀을 자기애적 연장선으로 여기거나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관객으로 취급하지 않고 살아 있는 감정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수용하고 존중할 줄 알게 된다. 자기애적 전이가 대상 전이로 발달하게 되는 시점에서 분석관계는 종결에 이른다.
Ⅲ. 결론
라캉적 관점에서 강박증자 윌은 분석가를 알고 있는 주체로 가정하는 라캉적 의미의 임상은 시작해보지 못한 채 분석을 끝냈다고 볼 수 있다. ‘예비면담’이 끝나고 ‘본격적인 분석’으로 이행되는 시점에서 분석도 영화도 끝나기 때문이다. 현대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본 윌과 숀의 단기 정신분석은 타인을 관객 취급하던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애적 전이상태가 분석가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수용하고 소통할 줄 알게 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전이, 즉 대상 전이로 바뀌는 극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 끝맺고 있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고전적인 의미의 전이는 신경증자와 분석할 때 일어나는 대상 전이를 뜻한다. 그는 환자가 과거 부모나 가족에게서 느꼈던 감정을 현재 분석가에게서 느끼게 되는 것을 일반적인 의미의 전이라고 부른 것이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윌과 숀이 만나서 교류하는 초기 장면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전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분석가가 환자의 내면에서 한 사람의 어엿한 대상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전이 이전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을 ‘예비면담’만 하고 ‘본격적인 분석’에 들어가지 못한 라캉적 의미의 강박증자 개념으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자기애적 전이 상태로 보는 현대정신분석의 개념으로 진단하고 분석해보았다. 결론적으로 프로이트, 라캉, 현대정신분석적 입장 모두에서 윌의 전이는 분석과 영화가 끝날 무렵에 가서야 분석가에게 어떤 대상이든 전이할 수 있는 ‘대상 전이’ 단계나 ‘본격적인 분석’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Ⅳ.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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